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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카와 드림

하이큐, 아오바죠사이 미들 블로커
마츠카와 잇세이와 구원→친구→연애 드림합니다



마츠카와 잇세이 (松川 一静)
아오바죠사이 3학년, 배구부

하나무라 모모카 (花村 桃花)
아오바죠사이 3학년, 배구부 매니저




하나무라 모모카는 말이 많은 아이였지만 집중을 오래 유지하는 타입이었다. 사격은 그런 모모카에게 잘 맞는 종목이었다. 숨을 고르고, 방아쇠에 힘을 싣고, 결과가 나올 때까지 흔들리지 않는 것. 연습이 끝나면 귀가 멍멍해질 때도 있었지만, 그건 싫지 않았다.

“잘했다”는 말보다
“안정적이다”는 평가가 더 기뻤다.

그때의 하나무라는 미래를 크게 그리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가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고는 정말로 순식간이었다. 사격장 내부에서 장비 점검이 끝났다는 신호가 있었고, 하나무라는 평소처럼 자세를 잡았다. 익숙한 무게, 익숙한 소리. 그 다음은 기억이 끊겼다. 귀가 찢어질 듯 울렸고,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통증이 오기 전, 먼저 느낀 건 ’보이지 않는다‘ 는 공포였다.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왼쪽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회복은 어렵습니다.”

의사의 말은 담담했다. 그 담담함이 더 잔인하게 느껴졌다. 결국 왼쪽 눈을 잃었고 왼쪽 눈과 마찬가지로 희망도 잃었다. 점점 아픔이 무뎌져가고 재활이 익숙해져 갈수록 우울감은 커져갔다.

학교로 돌아갔을 때,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바로 알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 몸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왼쪽의 공백이 느껴졌다. 계단을 내려갈 때, 누군가가 갑자기 다가올 때, 늘 반응이 반 박자 늦었다. 사격은 공식적으로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다른 걸 해보는 건 어때?”
“관리 쪽도 잘할 것 같은데.”

그 말들이 전부 ‘포기해’라는 말로 들렸다. 하나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방에 틀어박혔다. 잠을 자거나, 아예 자지 않거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울면 뭔가 끝나버릴 것 같아서, 이 시기에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약을 먹었고 상담을 받았지만 가장 힘들었던 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감각이었다. 의안을 처음 끼던 날, 거울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회색, 오른쪽 눈과 최대한 비슷한 색.

“이걸로… 괜찮아 보이겠지.”

그때부터 하나무라의 목표는 하나였다. 튀지 않는 것. 그리고 동정심을 받지 않는 것.

고3이 되었을 때, 하나무라는 스스로 전학을 선택했다. 이 학교에서는 ‘사격 사고 난 애’ 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새 학교, 아오바죠사이에서의 첫날. 아무도 하나무라를 몰랐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숨을 쉬게 해줬다. 사격부는 선택지에 없었다. 신청서에 적을 수조차 없었다. 대신 들어간 동아리는 배구부 매니저 동아리였다. 기록하고, 정리하고, 관리하는 그저 그런 동아리.

체육관 문을 여는 소리는 항상 컸다. 철제 문이 미끄러지듯 열리며 울리는 소리. 하나무라는 그 소리를 아직도 좋아하지 않았다. 고3 전학 후, 체육관은 생각보다 자주 드나들지 않는 장소였다. 배구부 담당 선생님께서 배려 해주셨기 때문이다. 기록물 전달, 장비 확인… 누군가 시키면 가는 곳.

그날도 그랬다. 공 정리 상태를 확인하라는 말에 메모지를 들고 체육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이미 안에는 배구부가 있었다. 공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 신발 마찰음, 누군가의 짧은 외침. 하나무라는 반사적으로 문 옆에 붙어 섰다. 시야 왼쪽이 비는 감각이 들어서였다. 그때, 공 하나가 바닥을 튀기며 굴러왔다. 하나무라 쪽으로.

“…!”

몸이 먼저 굳었다. 소리는 들렸는데, 어디서 오는지 바로 파악이 안 됐다. 공은 하나무라 발 앞에서 멈췄다.

“아— 미안.”

낮고, 차분한 목소리. 하나무라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자기보다 훨씬 큰 그림자가 서 있었다. 땀에 젖은 유니폼, 목에 걸린 수건, 조금 무심해 보이는 눈. 그는 공을 주우려다 굳어있는 하나무라의 얼굴을 보고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로 아주 잠깐. 그 시선은 호기심도, 당황도 아니었다. 확인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는 물었다.

“왼쪽, 잘 안 보여?”

돌려 말하지 않았다. 속삭이지도 않았다. 그냥, 사실 확인. 하나무라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은 지금까지 눈을 피하거나 괜히 웃거나 ‘괜찮아?’를 덧붙였다.

하지만 마츠카와는 그런 걸 하나도 하지 않았다.

“…네.”

짧게 대답했다. 변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이쪽으로 갈게.”

그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하나무라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공을 든 손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바꿨다. 그게 끝이었다. 사과도 위로도 질문도 없었다. 그는 공을 안고 다시 코트 쪽으로 돌아갔다.

“야, 맛층 공 가져와—”
“응.”

그 짧은 대답을 남기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갔다. 하나무라는 그 자리에 한참 서 있었다. 가슴이 뛰고 있었는데, 이유를 바로 알 수 없었다.

‘괜찮아?’라는 말보다, ‘어떻게 도와줄까?’보다
“그럼 내가 움직일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그날 이후, 하나무라는 체육관을 지날 때 왼쪽이 덜 무서워졌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체육관 복도는 늘 미묘하게 어두웠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는 구간이 있고, 바닥엔 공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나무라는 그 복도를 지날 때 항상 벽 쪽으로 붙어 걸었다. 왼쪽이 비는 감각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여전히 조심스러웠다. 그날도 관리 서류를 들고 체육관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서 공 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문을 열기 전에 숨을 한 번 고른다. 그때,

“어.”

문이 열리기 직전, 안쪽에서 누군가 먼저 그녀를 봤다. 그때 그 아이였다. 지난번보다 훨씬 가까웠다. 네트 옆, 정리 중인 듯 공을 모으고 있었다. 하나무라는 그가 자기를 기억할지 확신이 없었다. 자주 보이는 얼굴도 아니었고, 그날도 특별한 말을 나눈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하나무라를 보자마자 말했다.

“지난번 그 애지.”

그 말에 하나무라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기억하세요?”
“응.”

대답은 짧았다.

“오늘도 일 있어?”

그 질문은 ‘왜 왔냐’가 아니라 ‘여기 와도 되냐’에 가까웠다.

“장비 점검표요.”
“아, 그거.”

마츠카와는 코트 쪽으로 고개를 까딱했다.

“감독님 아직 안 왔어. 거기 벤치에 두면 돼.”

하나무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해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말해준 쪽은 자연스럽게 오른쪽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위치를 잡아두고 있었다. 하나무라는 벤치에 서류를 두고 돌아섰다.

“이름.”

그 아이가 불렀다.

“…네?”
“너 이름 뭐야.”

갑작스러웠지만, 이상하게 부담되지는 않았다.

“하나무라… 모모카예요.”

잠깐의 정적.

“하나무라.”

이름을 한 번 굴려본 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마츠카와, 잇세이.”

굳이 풀네임은 아니었지만, 자기 쪽을 조금 더 열어준 느낌이었다.

“사격부였지?”

하나무라의 표정과 손이 굳었지만 괜찮은 척 말을 이어나갔다.

“…예전에요.”

마츠카와는 더 묻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지금은?”
“배구부 매니저요.”
“처음보는데.”
“전학왔고, 담당 선생님께서 배려해주셔서요.”
“전학 온 건 알고 있었어. 그래 자주 보자 하나무라.“

하지만 그 짧은 대화 사이에 이상하게도 불편한 침묵이 없었다. 그는 공을 정리하다 말고 하나무라 쪽을 힐끔 봤다.

“여기 사람 많으면 왼쪽 불편하지.”
“… 네.”
“그럼 나중에 올 땐 문 옆에 서 있어. 애들한테 말해둘게.”

지시처럼 들렸지만, 실은 배려였다. 하나무라는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체육관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말로 대답했다.

“…고마워요.”

마츠카와는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당연한 거야.”

그 말이 이상하게 가볍지 않았다. 하나무라는 체육관을 나서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이 사람은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라 같이 있는 위치를 맞추는 사람이라는 걸.

체육관에 들어오는 발소리가 났다. 마츠카와는 공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심스럽고, 늘 같은 속도의 걸음. 하나무라였다. 파일을 안고 문 옆에 잠깐 멈췄다가 들어오는 것도 여전했다.

“하나무라.”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고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일찍 왔네.”
“선생님이… 오늘은 그냥 두라고 하셨어요.”

마츠카와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 쪽이라 그런 줄로만 알았다.

“매니저 일, 힘들지?”
“…아니요.”

잠깐 뜸을 들였다.

“많이 안 해요.”
“그래?”
“담당 선생님이 자주 안 나와도 된다고 하셔서요.”

그 말투엔 변명도, 불만도 없었다. 그냥 사실 전달. 마츠카와는 잠깐 그녀를 봤다.

“그럼 왜 매니저 해?”

하나무라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체육관이 아예 싫지는 않아서요.”

그 대답이 묘하게 솔직해서 마츠카와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벤치 쪽을 가리켰다.

“거기 앉아. 오늘은 훈련도 길어.”

하나무라가 앉자, 마츠카와는 옆에 서서 물병을 열었다.

“근데.”

말을 꺼내고는 잠깐 멈췄다.

“너, 몇 학년이야?”

하나무라는 고개를 들었다.

“3학년이요.”
“…고3?”
“네.”

마츠카와는 잠깐 굳었다.

“나도 고3인데.”

그 말에 이번엔 하나무라가 알고있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알고 있었는데요?”
“근데 왜 존댓말 해.”
“초면에 반말은 예의가 아닌 거 같아서요.”

잠깐의 침묵. 마츠카와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난 예의가 없는 건가?”

조금은 능글거리는 말투로 가까이 다가와 물어보았다. 하나무라는 당황해 고개를 뒤로 빼며 말했다.

“그, 그런게 아니라…”
“그럼 말 놓을까? 사실 너만 놓으면 돼.”

생각보다 빨리 나온 말이었다. 하나무라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대답 하나로 둘 사이의 공기가 바뀌었다. 체육관 소음 속에서도 둘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매니저면 다음에 경기 때도 오지?”

하나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러진 않아요. 컨디션 안 좋을 땐 안 나와도 된대요.”
“그게 더 낫네.”
“네?”
“억지로 안 나와도 되잖아.”

그 말에 하나무라는 잠깐 웃었다. 정말로 아주 작게. 마츠카와는 그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아, 이 사람 웃을 줄 아는 사람이구나.

그날은 훈련이 없는 날이었다. 체육관은 조용했고, 불도 절반만 켜져 있었다. 하나무라는 매니저 업무도 없었고, 담당 선생님이 “오늘은 굳이 안 나와도 된다”고 했지만 잠깐 들를 일이 있어서 체육관에 왔다. 마츠카와는 혼자 남아 네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

먼저 알아본 건 마츠카와였다.

“오늘은 안 오는 줄 알았는데.”

말을 놓는 게 아직 완전히 익숙하진 않았다. 하나무라는 벤치에 앉아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조용했다. 공 튀는 소리도, 발소리도 없었다. 그때였다. 하나무라가 가방을 열고 작은 케이스를 꺼냈다. 익숙한 손놀림. 조심스럽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마츠카와는 무심코 그걸 봤다가 시선이 멈췄다. 케이스 안에는 의안 보관액과 작은 집게가 있었다.

“… 그거.”

마츠카와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낮아졌다. 하나무라는 손을 멈췄다.

“봤어?”
“…응.”

잠깐의 침묵. 마츠카와는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물었다가 물었다.

“난… 그냥 왼쪽이 안 보이는 줄만 알았어.”

하나무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 그래.”

케이스를 닫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았다.

“고1 때 사고 때문에.”

담담한 목소리였다. 마츠카와는 그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항상 왼쪽을 조심하는지, 왜 고개를 숙일 때가 있는지, 왜 체육관이 ‘싫지 않다’고 말했는지.

“…아프진 않아?”

질문치고는 너무 늦게 나온 말이었다. 하나무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요.”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처음엔 좀.”

마츠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말을 잘못 꺼낼까 봐. 하나무라가 의안을 살짝 꺼냈다. 그건 핑크색이었다. 마츠카와는 눈이 아주 잠깐 커졌다.

“…핑크네.”
“아, 아… 응.“
“좋아하는 색?”
“… 응.”

마츠카와는 그 색을 한 번 더 봤다. 튀는 색이었지만, 이상하게 하나무라에게 어울렸다.

“근데 왜 가지고 다니기만하고 안 껴?”

하나무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 작게 중얼거린다.

“튀잖아. 너도 그렇게 생각했지? 튀는 색이라고”
“아니, 튀는 색이라곤 생각했지만 어울릴 거 같다라고도 생각했는데.”

하나무라는 동그래진 눈을 뜨고 마츠카와를 쳐다보며 말했다.

“어울릴… 거 같았다고…?”

눈이 반짝거렸다.

“응. 잘 어울릴 거 같아. 그리고 난… 그냥 안 보이는 줄 알았지. 이렇게까지 안 보이는 줄 몰랐어.”

하나무라는 그 말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래도 돼,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마츠카와는 하나무라 앞으로 다가가 벤치에 앉았다.

“그래도, 난 알고 싶었어.”

하나무라의 손이 잠깐 멈췄다.

“…왜?”

마츠카와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불편해하는 거 줄이고 싶어서.”

짧고, 솔직한 이유였다. 하나무라는 잠깐 눈을 내리깔았다가 의안을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그럼. 멀어지지마, 평소처럼 해.”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똑같이 할게.”

그리고 덧붙였다.

“다만, 오른쪽은 계속 내가 맡을게.”

하나무라는 아주 작게 웃었다. 체육관엔 다시 조용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날 이후, 둘 사이엔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아침 공기가 맑았다. 학교 정문을 지나며 하나무라는 잠깐 멈춰 섰다.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다. 왼쪽 눈, 핑크색 의안. 예전 같으면 회색으로 맞춰서 최대한 티 안 나게 했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게, 질문받지 않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괜찮아.”

혼잣말처럼 중얼리고 어깨를 한 번 펴고 걸었다. 복도는 시끄러웠다. 평소 같으면 벽 쪽으로 붙어 걸었을 텐데 오늘은 가운데를 지나갔다. 시선이 느껴졌다. 한두 명이 힐끗 보다가 멈췄다.

“…핑크?”
“의안인가?”

속삭임이 들렸지만 하나무라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응, 의안이야.”

하나무라 먼저 말했다.

“어때? 예쁘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묻던 쪽이 더 당황했다.

“…어, 어… 응.”

하나무라는 웃었다. 전보다 훨씬 밝은 얼굴로.

체육관 앞. 마츠카와는 신발을 갈아 신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

하나무라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걸음도 가벼웠다. 표정도, 자세도.

그리고— 마츠카와의 시선이 왼쪽 눈에 멈췄다.

핑크색.
순간 말이 안 나왔다.

“…저기.”
“어어…”

하나무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마츠카와는 한 마디 하고 빤히 쳐다본다.

“핑크.”
“… 어때?”

마츠카와는 잠깐 멍해졌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너 같아.”

하나무라의 눈이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튀는데, 이상하진 않고 딱 너.”

그녀가 웃었다. 이번엔 숨기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럼 성공.”

그날 하나무라는 벤치에만 있지 않았다. 볼이 굴러가면 먼저 주워주고, 타월이 부족하면 먼저 챙기고, 선수들한테도 먼저 말을 걸었다.

“물 필요해?”

예전의 조용하지만 딱 필요한 말만 하던 하나무라가 아니라 돌아온 모모카였다. 마츠카와는 그걸 보며 괜히 웃음이 났다.

“너 원래 이런 애였지.”
“뭐가?”
“이렇게 잘 웃고, 잘 말 걸고.”

잠깐 멈칫하더니 하나무라가 말했다.

“…잊고 있었나 봐.”
“뭘.”
“나 이런 애였다는 거.”

마츠카와는 공을 돌리며 말했다.

“잊은 게 아니라, 잠깐 숨 고른 거지.”

하나무라는 그 말을 듣고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교길, 하나무라가 말했다.

“나 있지, 이제 숨기지 않을 거야.”
“뭘.”
“눈도, 나도.”

마츠카와는 대답 대신 그냥 걸음을 맞췄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난 옆에 있을게.”

핑크 의안은 이제 상처가 아니라 선언처럼 보였다.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고.

체육관은 시끄러웠다. 연습 경기 날이라 다른 학교 부원이 모여 있었다. 하나무라는 평소처럼 벤치 옆에서 물병을 정리하고 있었다. 핑크 의안은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야.”

작게 들린 목소리.

“저거 봐.”
“눈 색 뭐냐.”

웃음 섞인 소리. 호기심과 조롱이 섞인, 딱 기분 나쁜 톤. 하나무라는 들었다. 못 들은 척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손을 멈추지 않고 그냥 하던 일을 계속했다.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 순간—

“야.”

낮고 단정한 목소리, 마츠카와였다. 그는 공을 들고 있었고 상대 팀 쪽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해.”

상대가 어정쩡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의안이 좀—”
“의안이면 뭐.”

마츠카와는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소리를 키우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협적이었다.

“다치면 끼는 거고, 안 보이면 쓰는 거지.”
“근데 굳이 저 색을—”
“그게 왜.”

마츠카와가 말을 끊었다.

“너한테 피해 줬어?”

정적.

“아니잖아.”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 보지 마, 나도 닳을까봐 못 보겠는데… 말은 더더욱 하지 마.”

상대는 뭐라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마츠카와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냥 공을 들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나무라도 그 뒷모습을 봤다. ‘괜찮아?’ 같은 말도 ‘미안해’도 없었다. 그게 오히려 좋았다. 연습이 잠깐 멈췄을 때 하나무라가 먼저 말을 걸었다.

“…고마워.”

마츠카와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아까.”
“그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고마울 일 아냐.”

하나무라도 웃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아.”

마츠카와는 잠깐 하나무라를 보고 말을 건넨다.

“아까 아무 말 안 했잖아.”
“응.”
“전 같았으면 고개 숙였을 텐데.”

하나무라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젠, 나한테 숨길 게 없어서.”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네.”

그날 이후, 하나무라를 향한 시선은 줄었다. 아니 정확히는 함부로 보지 못하게 됐다. 마츠카와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무라가 더 이상 작아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츠카와는 알았다. 자기가 한 건

앞에 서준 게 아니라— 옆에 서준 것이라는 걸.

요즘 마츠카와는 연습이 끝나면 무의식적으로 체육관 입구를 본다. 하나무라가 있으면 컨디션이 괜히 안정적이고, 없으면

“오늘은 안 왔구나” 하고 한 번 더 생각한다.

어느 날, 하나무라가 학교에 오지 않았다.

“마츠카와.”

부원이 말했다.

“하나무라 오늘 안 와?”
“…몰라.”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연습 내내 시선이 자꾸 입구로 갔다. 끝나고 나서야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은 안 와?’

보내고 나서 괜히 화면을 꺼버렸다.

잠시 뒤.

오늘은 쉬는 날이야. 선생님이 집에 있으라고 하셔서. 그 한 줄에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럼 잘 쉬어.’ 평소랑 똑같은 말이었는데 괜히 더 신경 쓰였다. 하나무라도 마찬가지였다. 핑크 의안을 낀 이후 사람들 앞에 서는 게 덜 무서워졌고, 웃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런데— 마츠카와 앞에서는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졌다. 말 하나, 표정 하나가 괜히 신경 쓰였다.

“오늘 연습 어땠어?”
“괜찮았어.”
“거짓말.”
“…왜?”
“어깨에 힘 들어갔어.”

그걸 알아챘다는 사실에 마츠카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 나 되게 잘 보네. 나만 보나 봐?”

하나무라는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늘 보니까…” 그 말이 괜히 오래 남았다.

마츠카와가 다른 매니저에게 말을 걸었다.

“테이핑 좀 봐줄래?”

그 모습을 보며 하나무라는 이유 없이 시선이 갔다. 별일 아닌데, 괜히 마음이 답답했다.

‘왜지.’

잠시 뒤 마츠카와가 돌아왔다.

“하나무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얼굴 아닌데.”

하나무라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 인기 많네.”

마츠카와는 얕게 웃었다.

“갑자기?”
“그냥.”

그는 그제야 눈치챘다.

“…질투해?”

하나무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아니거든.”
“아—.”

마츠카와는 괜히 웃음이 났다.

“알겠어, 알겠어.”

그날 이후 마츠카와는 다른 사람이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하나무라 쪽으로 이동했다.

비슷한 날, 비슷한 시간. 둘은 늘 같은 벤치에 앉았다.

“하나무라, 여기가 네 자리냐.”
“이제는 그렇지.”

말은 농담인데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다. 하나무라가 피곤해 보이는 날엔 마츠카와가 먼저 말했다.

“오늘은 먼저 가도 돼.”
“…괜찮아.”
“괜찮지 않은 거 같은데.”
”조금만 있다가.”

그럼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가방을 옆에 내려놓고 앉았다. 함께 있는 게 해결책처럼 느껴졌다.

하교길, 바람이 불었다. 하나무라가 잠깐 균형을 잃자 마츠카와가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손목을 잡았다.

“…미안.”
“왜.”
“놀라게 해서.”
“난 괜찮아.”

손을 놓지 않았다. 몇 초 뒤, 서서히 풀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느꼈다.

마츠카와는 요즘 자기 컨디션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습이 잘 풀리든 안 풀리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항상 하나였다.

하나무라.

공을 때릴 때도, 리시브를 받을 때도, 머릿속 한구석에
‘지금 보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느 날, 연습 중. 상대 블로킹에 막혀 스파이크가 연달아 실패했다.

“괜찮아, 다음!”

동료들이 말했지만 마츠카와는 짜증이 올라왔다. 그때 벤치 쪽에서 하나무라가 손을 흔들었다. 엄지 하나, 조용히. ‘괜찮아.’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졌다. 다음 공, 깔끔하게 득점.

“…하.”

마츠카와는 그제야 알았다.
아. 나, 얘한테 이미 너무 깊게 들어갔구나.
연습이 끝난 뒤 부원이 툭 던졌다.

“마츠카와.”
“너 오늘 집중력 좋더라.”
“…그랬나.”
“매니저 있어서 그런 거 아냐?”

그 말에 부정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신 머릿속에 한 생각만 맴돌았다. 다른 사람이 하나무라를 그렇게 보거나 그렇게 부르는 게 싫다. 그날 처음으로 분명해졌다. 이건 호감이 아니라 독점하고 싶은 감정이라는 걸.

시험 기간 전날. 학교에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다. 하나무라는 도서관에서 나오다 체육관 쪽을 봤다. 불이 켜져 있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마츠카와가 혼자 있었다. 네트 옆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늦어.”

자연스럽게 같은 벤치에 앉았다. 밤의 체육관은 낮보다 훨씬 조용했다.

“오늘.”

마츠카와가 말했다.

“안 힘들었어?”
“조금.”
“근데 괜찮아.”
“요즘은 자주 ‘괜찮다’고 하네.”

하나무라는 웃었다.

마츠카와는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 한참을 망설이다 말했다.

“하나무라.”
“응?”
“…나 있잖아.”

말을 꺼냈다가 다시 삼켰다. 하나무라는 재촉하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너가 다른 사람이랑 있으면, 괜히 신경 쓰여.”

하나무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게 그냥 친구라서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체육관에 시계 소리만 났다. 하나무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마츠카와가 고개를 들었고 하나무라가 말했다.

“너랑 있으면, 이상하게 집에 가기 싫어.”

그 말에 마츠카와는 웃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말했다.

“그럼, 우리 이거. 이름 붙일까?”

완전한 고백은 아니었다. 사귀자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말은 그 어떤 고백보다 가까웠다. 하나무라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음에.”
“왜.”
“지금은,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어.”

마츠카와의 그 대답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알겠어.”

그날 밤, 둘은 끝내 손을 잡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질 때 서로를 바라보는 눈은 이미 연인이었다.

다음 날 해 질 무렵, 체육관 뒤편. 연습이 끝난 후였는데 마츠카와는 바로 집에 가지 않았다. 하나무라도 이유 없이 발걸음을 늦췄다. 둘 다 오늘은 그냥 헤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나무라.”
“응?”
“잠깐만 걷자.”

운동장 트랙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마츠카와가 멈췄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하나무라의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렸다. 마츠카와는 괜히 운동화 끝으로 땅을 한번 긁고 나서 고개를 들었다.

“나 있잖아.”

말을 꺼냈다가 한 번 숨을 고른다.

“네가 처음 체육관 왔을 때부터, 계속 신경 쓰였어.”

하나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듣고 있었다.

“네가 불편해 보이면, 괜히 내가 더 조심하게 되고.”

“웃으면, …그날 연습이 잘 됐어.”

마츠카와는 자기 말에 스스로 놀란 듯 잠깐 웃었다.

“이상하지.”
“…아니.”

그 한 마디에 마츠카와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 같이 있고 싶어. 핑크 의안도, 조심스러운 걸음도, 괜히 강한 척하는 표정도— 전부 포함해서.“

“그래서,이건 더 이상 헷갈리는 감정 아니야.”

마츠카와는 하나무라를 똑바로 봤다.

“나, 너 좋아해.”

짧았지만 도망갈 여지는 없었다. 하나무라의 손이 천천히 마츠카와의 옷자락을 잡았다.

“…나도.”

목소리가 작았지만 확실했다.

“나도, 네 옆에 있으면 정말 나인 것 같아.”

마츠카와는 아주 천천히 손을 뻗었다. 잡아도 되는지 묻지 않았다. 하나무라가 먼저 손을 얹었기 때문이다.

“…그럼.”

마츠카와가 말했다.

“우리, 이제 가자.”

대단한 말은 없었다. 하지만 그 문장은 앞으로를 전부 포함하고 있었다. 해는 완전히 지고, 운동장엔 불이 켜졌다.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엔 떼지 않았다.